신현대 - 설악가

2011. 10. 12. 18:13가요

 

 

설악가 / 신현대

 

굽이져 흰띠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는 계곡의 여운을
내어이 잊으리요 꿈같은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저멀리 능선위에 철쭉꽃 필적에  너와 나 다정하게 손잡고 걷던길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내다시 오리니 

-     -     -     -     -     -     -     -     -     -     -     -
"저높은 봉우리에 백설이 필적에 나는야 생각난다 친구의 모습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1969년2월14일 설악산의 "죽음의 계곡"이라는 곳에서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고자 훈련을 하던 젊은 산악인 10명이
눈사태로 목숨을 잃는 큰 사고가 있었답니다.
그때의 사고가 교훈이 되어 오늘날의 등산학교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또 산을 좋아 하는 이정훈(경기도 하남시에서 치과개업중) 이라는 분께서
산악인들에게는 불후의 명곡인 "설악가"를 작사,작곡하는 동기가 되었답니다

 

 



대한민국의 능선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갈라져 나간 천화대의 ‘석주길’.
1969년대 고(故) 엄홍석, 신현주 두 분의 이름 끝자를 따서 명명된 것입 니다.

설악산에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에
석주길 이라 고 하는 릿지코스가 있습니다.

"천 가지의 꽃이 피어있다" "바위에 피어있는 꽃" "하늘 꽃"이라는 숱한 설을 남긴
천화대는 그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입니다.
천화대는 비선대에서 철계단을지나 천불동계곡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초입이 시작됩니다.
끝 지점인 공룡능선에서는 비선대 방향으로는 동북쪽으로 연결되어 있고
외설악을 대표하는 3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하는 구간입니다.

희야봉에서는 범봉을 앞에 두고 설악골과 잦은바위골로 길이 갈라지고
맞은편으로는 범봉과 공룡능선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잦은바위골에 다다르면 50m,100m 폭포는 장관을 이룹니다.

천화대에서는 화채봉과 동해바다가 보이며 북동쪽으로 울산암이 바라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풍광과 조망 또한 좋아서 등반 내내 발길을 멈추곤 합니다.

이중 설악골에서 범봉사이에 성곽과도 같은 침니로 이어진 리지구간이 석주길 입니다.
석주길에 얽힌 가슴저린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요델산악회의 송준호, 엄홍석, 신현주 세 사람은 서로 자일 파트너였고
동시에, 절친한 친구이자 연인 사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송준호는 사랑보다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
세 사람의 순수하고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엄홍석과 신현주 의 곁을 홀연히 떠납니다.

송준호가 떠난 얼마 후 엄홍석과 신현주는 연인 사이가 되었고,
두 사람은 설악산 천화대 천당폭으로 빙벽등반을 하러 갑니다.
그러나 빙벽을 오르던 중 신현주가 그만 실족을 하자
당시 빌레이( 확보)를 보던 엄홍석은 연인인 그녀의 추락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빙벽 아래로 자신의 몸을 날립니다.
그러나 빙벽 에 설치한 확보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했고
두 연인은 한 자일에 묶인 채 추락하여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 후 두 친 구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송준호는
악우인 엄홍석과 신현주의 넋을 달래기 위해
968년 7월 지금의 천화대 석주길을 개척하며
엄홍석의 이름 끝 자인 "석"과 신현주의 끝 자인 "주"를 딴 석주길이라는
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산악계에서는 처음 길을 개척한사람에게 "명명(命名)권" 을 주게 되는데
송준호에게 명명권을 주어 두 사람의 석주길 이라는 길이
설악산 천화대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석주길’이라고 새긴 동판을 만들어 천화대와 만나는
바위봉우리의 이마 부분에 붙여 두 사람의 영전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송준호 역시 1973년 초 토왕폭을 단독으로 오르다 가 실족하여
먼저 간 두 친구의 영혼을 뒤따르게 되고
그의 시신은 그토록 사랑하던 친구인 엄홍석과 신현주의 곁에 묻히게 됩니다.
그렇게 석주길의 신화가 설악산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1973년 새해 첫 날 밤 등반하루 전 그는 엄홍석과 신현주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깁니다.
죽음을 예감 이라도 한 듯 번지 없는 주소로 엽서를 보냅니다.
받는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에서 노루목" 보내는 사람 "준" 그것이 전부인...

한편 서울에서는 토왕성폭포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겠다던 송준호의 애인은
1973년 1월5 일 오후2시 서울 중앙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영을 앞두고
그를 기다립 니다.
그가 나타나 지 않자 뇌리에 스쳐오는 송준호를 생각하며 극장가를 떠납니다.
송준호는 그녀가 짜준 목도리와 장갑 모자를 가슴 에 품은 채 토왕폭에서
그녀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송준호는 토왕폭을 등반 후 돌아와 그 녀와 함께 스위스 등산학교를 유학 한 후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 가을 산악회에서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가지게 되었는데
동판은 제14 봉에 부착했습니다.
애인은 동판에 송준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고인의 뜻대로 강하게 살아가겠다고".



그 후 1974년 1월2일 1주기가 되던 해 송준호와도 산 친구는 설악의 노루목을 찾았습니다.

그는 산 친구인 송준호에게 절을 하며 약속합니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그 이듬해 그 들은 결혼해서 그들의 꿈이었던 목장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설악가처럼 굽이져 흰띠두른 능선길 따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설악산 노루목에 엄홍석 신현주와 함께 묻혀있으며
이들 세사람의 충혼비는 이러합니다.

"시간(時間)과 존재(存在)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

 

 



설악가는 세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그리며 지어 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구전으로 대학 산악부에서 많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난 바람 넌 눈물>로 가요계에 데뷔한 산악인 가수 신현대님의 목소리로 들어 봅니다.
마지막 3절이 찐하고 슬프네요.
송준호가 죽은 친구(엄홍석, 신현주)를 생각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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